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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5-21 14:00
"가을 타세요?"
 글쓴이 : 신 아연
조회 : 5,020   추천 : 0  

"집사님 가을 타세요?"

지난 주일 아침, 교회 마당에서 한 교우가 불쑥 이렇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 분은 제 또래인 데다 평소 책을 '밥 먹듯' 보는지라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의미로 물었을 것이란 생각에 순간 긴장이 됐습니다.

 

"글쎄요.., 사실 저는 사계절을 탑니다."

"호호, 집사님은 만년 소녀 같아요."

'만년 소녀?' 제 스스로는 '만년 할매'처럼 느껴지는데 이 또 무슨 뜬금없는 평판이란 말입니까.

예배가 곧 시작되는 터라 대화를 건성 마무리하고 각자 자리를 찾아 갔지만 "가을 타세요?" 라던 그 분의 말이 한 주 내내 울림처럼 계속 여운을 남겼습니다.

'가을을 탄다는 것', 농담 잘하는 지인 하나는 '가을은 전신마비의 계절'이라고 했지만, 제 경우 식욕이야 사계절 극성스러우니 특별히 가을이라고 해서 '천고마비' 운운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식욕이 솟구치는 걸 두고 가을을 탄다고 하지는 않으니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색없이 감상에 젖어 바바리 깃을 세운 채 추적이는 빗속에 뒹구는 낙엽을 밟거나, 낭만어린 찻집에서 누군가와 향기 짙은 커피잔이라도 마주하고파야 하는 걸까요. 마음이나 일상에 여백이나 자투리를 두는 편이 아닌 제게는 두 짓 다 별로 내키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갑자기 "그럼 집사님은 어떠세요? 가을 타세요, 안 타세요?" 라고 되묻고 싶은 조바심이 생깁니다. 독서량이 풍부한 '그 분의 가을'은 어떠한지 다음번에 만나 확인하기로 하고 사무실 근처에서 일하는 동갑내기 친구를 찾아갑니다.

" 나 가을 타나봐..." 이런, 또 '가을 타는' 이야기입니다. 이 친구가 타는 가을은 구체적입니다. 지인들이 돌아가시는 것이 견디지 못하게 가슴 아픈 데다 그렇게 가깝지 않은 사람의 부음에도 자꾸 눈물이 난다는 겁니다. 정을 쏟아 가꾸어 왔던 관계를 쉽고 무심하게 깨버리는 것에 너무 속이 상하고 거울 속의 예쁘지 않은 중년 여자가 낯설기만 한데 그 모습이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서글프다고도 했습니다. 그래놓고는 공연히 서러운지 눈물을 훔치며 가을 타는 것 같다는 말을 또 합니다.

'그래, 가을 타는 것 같네... 니 맘이 곧 내 맘인데 공감 못할 리가 있겠어...' 속으로 되뇌며 박명의 거리를 지나 사무실로 돌아오는 발길이 유독 쓸쓸합니다.

생사로의 갈림길, 관계의 절연, 젊음과의 결별 등을 아파하던 친구가 며칠 전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 날 그 친구의 '가을앓이'가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주제 속에 모두 녹아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이 친구는 지금 혹독하게 가을을 타고 있나 봅니다.

차가워진 밤기온 탓에 옹송거리다 잠이 들어서인지 내처 아침까지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며칠째 새벽녘이면 깨게 됩니다. 그렇게 깨고 나면 태앗적 기억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듯 날선 면도날처럼 날카롭고도 선연하게 '나'라는 존재의 근원과 선험적 양심을 인식하게 됩니다. 마치 어둠을 사르고 스며든 자객에 얼어붙 듯, 홀로 깨어 명료할 대로 명료해진 의식이 근원적 두려움과 독대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데 대한 죄책감과 회한이 절대적 미량 천칭을 번갈아 오르내립니다.

지옥은 바로 '죄와 실수, 태만과 방기를 용서받고 고침 받을 기회를 더 이상 주지 않는 곳'이 아닐까 하는 평소 생각도 잠이 깬 새벽에 가장 선명합니다. 동료들의 망령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로 끌려 다니는 스크루지처럼 당최 구제가 불가능한 영혼의 소유자가 바로 '나'라는 절망과 회오로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부대끼고 나면 개운치 못한 아침을 맞을 때도 있고, 감기를 떨쳐버린 다음 날처럼 가뿐하고도 순수한 감사의 아침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전에 없이 자꾸 잠에서 깨어 영혼의 헹굼질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저 역시도 가을을 타나 봅니다.


정동철 10-05-24 17:45
 
맞아요.. 지금 가을이죠!? 호주에 온지 14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계절감각이 바뀌지 않아 가을이 봄처럼 느껴진답니다. 님의 칼럼 덕분에 봄의 미망에서 벗어나 '가을 타는 남자' 한번 돼 보렵니다. ㅎㅎ
신 아연 10-05-26 13:24
 
정동철님 이미지가 가을 남자로는 제격일 것 같군요.^^ 요즘 님의  글이 점점 윤기를 더해 가는 것이 5월의 신록을 연상시킵니다만.
정동철 10-05-28 11:51
 
가을 탄다는 말은 가을을 말처럼 타고 비상하는 걸 말하나요? ㅎㅎ 그런 날음을 경험했음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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