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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7-05 10:21
16강 가던 날
 글쓴이 : 신 아연
조회 : 4,503   추천 : 0  

밤새 내린 서설을 맞이한 경이로운 아침의 탄성처럼, 머리맡에 놓인 산타클로스의 선물 꾸러미를 풀 때의 설렘처럼, 엊그제 아침, 잠 덜 깬 눈을 비비며 확인한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 소식은 이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쿨쿨 자고 있는 동안 우리 선수들은 이렇게 환상적인 게임을 펼쳐 주었으니 마치 '우렁이 각시'의 밥상을 받은 떠꺼머리 총각같이 고맙고도 송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들한테서 제일 듣기 싫어한다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까지 용서가 될 정도로 요즘은 어디가나 축구이야기입니다. 아니 축구 이야기일 것입니다. 호주는 전세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전세계 언어를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릇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까요.

지구상 온갖 인종이 섞여 살다보니 월드컵 기간 내내 승자의 환호가 터지고 패자의 곡소리도 동일하게 들립니다. 어느 나라, 어느 경기든 간에 다수와 소수의 차이만 있을 뿐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골이 터질 때마다 일제히 환성을 내지르며 온 나라가 들썩이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이민자 나라의 월드컵 정경입니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 결과는 이미 아는 것, 일과가 끝난 느긋한 시간에 이르러서야 아껴 먹을 양으로 감춰뒀던 과자를 꺼내듯 녹화해 둔 경기를 틀었습니다.

'오늘 다음에 어제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온 시절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지만, 내가 이미 다 아는 일들이 닥쳐 올 테니 적어도 두렵지는 않을 거 아냐.'

막 TV 앞에 앉았는데 오래 전 썼던 칼럼의 어느 소설 속 인용 구절이 느닷없이 떠오릅니다. 그 때 저는 '어제의 시점에서 오늘의 예측불허를, 오늘 지금 이 순간에서 내일의 불확실성을 얼마나 힘들어 했으면 그 무력감을 차라리 무슨 일이 벌어질지 벌써 다 알고 있는 어제가 오늘 다음으로 왔으면 좋겠다고까지 표현했을까.' 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오늘 다음에 온 어제'는 화자의 근심처럼 두렵기는커녕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두고두고 곱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근사하게 찾아왔으니 오늘 다음에 온 어제가 마냥 좋기만 합니다. 물론 엄격히는 어제 일이 아니지만 닥친 일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눈 앞에는 '어제의 경기'가 기기묘묘하게 펼쳐집니다. '곧 반전될 상황이 올 텐데 그걸 모르고 지금 이 순간 모두들 저렇게 낙담하고 실망하는구나, 햐, 동점골을 뽑아 낸 지금은 모두들 서광이 비치고 희망적이라고 믿을 테니 결국 패배하게 된다는 걸 예상 못할 테지, 주장 박지성 선수는 동점골 이후 경기가 끝날 때까지 피를 말리는 것 같았다니 비길 줄 미리 알았더라면 룰루랄라하며 시간을 끌었을 텐데...'

남들 다 본 게임을 뒤늦게 보면서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를 하고 있자니 제 자신이 마치 전지한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기대와 달리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도무지 매가리가 없고 신명이 나지 않았습니다. 경기 결과를 알기 때문에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차원과는 좀 다른, 권태와 무료함이 정신을 꼼짝 못하게 동여매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기껏 축구도 이러한데 만약 삶의 결과를 미리 안다면, 무료와 권태의 스트레스에 매몰될 게 분명합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가까스로 터진 한 골에 거침없이 환호하고 아낌없는 열광의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하거늘, 순간순간 아깝게 놓친 기회에 장탄식과 애통함으로 반응하고 또 다른 찬스를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 하건만, 역전과 반전의 엎치락 뒤치락을 넘나들고, 승리와 분패의 격정적 파노라마와 감동의 물결을 함께 타야 제맛인데, 언감생심 역사적 순간이 와도 도무지 맨송맨송, 무감각, 무덤덤하기가 당황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제가 글에 썼던 오늘의 예측불허, 내일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은 완전히 제거됐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기대와 열정, 희망과 선택, 상상력마저도 몽땅 빼앗긴 탓입니다.

결론이 이미 난 삶을 되짚어 사는 것도 그러할 것입니다.

'지루하게' 시간이 흘러 16강이 확정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우리 선수들과 국민들이 함께 연출한 그 새벽의 함성과 환희 속에 나는 빠져 있었다는 것이 한탄스럽다 못해,

실시간 경기를 놓치고 녹화된 화면을 보는 것은 마치 자기 삶을 남의 것인 양 관전하는 것과 같고, 순간순간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삶의 종착지에서 비슷한 회한이 들 것이라는 깨달음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음에 어제가 오기를 바라서는 절대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동철 10-07-05 18:07
 
저두 16강 가던 날 그랬죠. 새벽잠을 이긴 자만이 참 환희를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 환희는 놓쳤지만 이렇게 통찰력 있는 '뒷북'을 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신 아연 10-07-07 01:02
 
더 우스운 건, 후반 뒷부분에는 어차피 골이 안 들어가는 건데, 순간 빠져서 보다보니 골이 들어갈까 말까 하는데서 탄성이 조금 나오는 겁니다. 그러다 '내가 왜 이러지, 어차피 더 안들어 가는 거 다 알고 있잖아.' 이랬습니다.^^
정동철 10-07-07 09:35
 
복기도 흥미롭게 하셨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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