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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1-21 17:42
불법 체류자의 고통(1)
 글쓴이 : 신숙희
조회 : 5,519   추천 : 0  
 한국인 변호사에게 전화할지 말지 몇 번이나 망설였다. 결국 연락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를 들어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여학생의 시민권 신청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기 두려워서일 것이다. 그 한국인 변호사가 추천한 호주인 변호사의 호언과는 달리 이번 건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중국, 미국 다음으로 불법 체류자가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 번씩 불법 체류자가 이민부 직원들에게 적발돼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한국이 살기 좋은데 왜 호주에 불법 체류를 하면서까지 살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딱히 설명할 수 없으나 대부분 직장 잡기가 힘들고 자녀의 교육비가 많이 들며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한국인 변호사의 요청으로 한국 불법 체류자들의 이민 신청권 서너 건을 도운 모든 경우가 다 그 이유였다. 무엇보다 그런 경험을 통해 불법 체류자들이 겪는 고통을 절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마지막으로 도와준 여학생이었다. 이 소송 건으로 한국인 변호사가 재판 하루 전날 나에게 증인 요청을 했을 때는 이미 부모가 불법 체류자로 적발된 뒤였다. 호주 이민부 장관에게 아이 셋의 시민권 신청 탄원을 제출했지만 이미 작은 두 아이의 신청은 기각됐다. 유일하게 남은 큰딸이 호주에서 살 수 있도록 재신청을 이민부 법원에 제출한 상태였다. 부모는 457 비자로 와서 호주에서 6년을 살았다. 부모가 불법 체류자로 추방령이 떨어질 경우 18세 미만의 세 자녀는 시민권 신청을 할 수 있었다. 판결문에 큰딸에 대한 결정은 재고해볼 소지가 있다고 해 재심 신청에 들어간 상태였다.
 
큰딸은 UNSW 의과대학에 외국인 학생 자격으로 이미 합격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큰딸만이라도 시민권을 받아 호주에서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의대 공부를 하기 바랐다. 내 역할은 그 아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러 가지 학업적 성장에 큰 방해가 되고 정신적 발전도 저해된다는 것을 언어학적 증거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변호사가 건네준 서류를 읽어보니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많은 한국 신청자와 다르게 그 학생이 유독 호주에서 공부해야만 되는 이유를 입증만 하면 호주 정부에서는 기꺼이 시민권을 줄 의향이 있다고 명시돼 있었다. 호주는 참 인본주의 나라이고 합리적 근거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자료를 읽어보니 단순히 한국의 교육 현실과 언어학적으로 그 학생이 이미 호주화해 한국의 경쟁적 교육 제도 등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것을 증거 제시만 하면 되는 케이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 정부 입장에서 단순히 그런 이유로 시민권을 주면 비슷한 불법 한국인들의 케이스를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선례를 남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한국에서 다시 직업을 구하기 힘들어 가족 부양이 어렵다는 점, 이 때문에 이 여학생이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도저히 일하면서 의과대학에 들어갈 학비를 마련하기 힘들다는 점, 무엇보다 이 경우에는 한국 대학의 외국인 특례 조건에 맞지 않고 설령 맞는다고 해도 경쟁률이 높아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특별한 현실에 초점을 둬야 했다.
 
재판이 있는 날 부모도 와 있었다. 나는 단 하루 동안 온갖 자료를 뒤져 나름대로 호주 이민부가 지정한 검사에게 반박할 근거를 마련했다. 증인으로 법원까지 온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중국계로 보이는 검사는 내 근거가 주로 인터넷 정보이므로 증거 불충분으로 믿지 못한다는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학생은 부모가 불법으로 거주해 재외동포 자녀 특례도 받을 수 없고 또 초등학교 때부터 호주에 와있지 않았으므로 한국 정부의 대학 입학에 대한 어떤 특혜도 받을 수 없었다. 이 조건을 묻지 않는 의대 특례는 한두 군데 대학에 있지만 그나마 한두 명 정도 뽑고 그 전년도의 경우 경쟁률이 매우 높다는 걸로 밀어붙였다.
 
다행히 판사가 그 검사의 반박을 기각해 안심이 됐다. 그 뒤 그 여학생의 변론이 있었다. 검사와 재판관은 그 연약한 여학생에게 질문을 마구 퍼부었다. '영어가 잘 되니 한국에 가서 학비를 벌 수 있을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교에 장학금 신청도 할 수 있지 않으냐'고 했다. 장학금 신청을 하기 위해 학원에서 공부를 다시 해야 하고 거기에 드는 비용과 다른 한국 학생들과 경쟁해 입학시험을 다시 치러야 한다는 내 변론과 학생의 고충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장학금 제도의 유무만 따졌다. 나는 확실히 모르지만 장학금 제도가 있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사의 조목조목 따지는 논고에 그 어린 여학생의 눈에 미처 떨어지지 못한 피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 링에 기댄 권투 선수처럼 그 여학생이 버텨주기를 바랐다. 다행히 그 여학생은 끝까지 침착히 잘도 받아넘기며 무사히 반론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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